Login

내게 주어진 모든 시간은 이유가 있었네

예함 줄리아 헤븐 김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3-10-04 09:42

예함 줄리아 헤븐 김 / (사)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올봄에 백내장 수술까지 하고 나니 릴레이 하듯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병치레에서 비로소 벗어난 듯한 기분이었다. 육십 해 동안 사용한 몸은 재정비라도 필요했는지 여러 병원을 드나들며 마치 종합병원 투어라도 하는 것처럼 그 시작은 2021년 11월 말이었다. 그날은 자정이 다 되어 가던 시각에 샤워하게 되어서 나름 평소보다 물소리와 주위에 신경을 쓰던 중이었다. 그런데 바디샴푸를 바르며 한 발을 살짝 들고 발가락을 닦으려던 순간, 그때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두 발이 허공을 향하며 둔탁한 소리와 함께 욕조 바닥에 벌러덩 자빠졌다. 아픈 것은 고사하고 바닥이 미끄러워서 도저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허공에 떴던 몸이 바닥에 닿기 전에 머리가 벽에 부딪히고 스르르 미끄러지며 또다시 뒷머리가 욕조 테두리에 닿으며 난 의지와 상관없는 자세로 누워 있어야만 했다. 다행히 헤드폰을 끼고 있던 아들이 헤드폰을 벗는 그 순간에 쿵! 하는 소리가 났고 아들은 “엄마! 무슨 일이야?” 황급히 욕실 문을 열어젖히며 샤워 커튼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괜찮아, 미끄러워서 넘어졌어.” 아들의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써 웃는데, 당황한 아들은 곧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엄마, 나 옷 갈아입고 올게. 병원 가자” 병원에 가야 한다며 자기 옷을 갈아입고 온다는 아들의 허둥지둥 대는 모습이 어이가 없다기보다는 귀엽다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졌다. “바디샴푸부터 씻어 내야 엄마가 일어나지. 미끄러워서….” 침착하고 부드럽게 아들을 안심시켜도 샤워기를 들고 있는 아들의 손은 덜덜 떨고 있었다. 나는 물에 씻겨 내려가는 샴푸에 섞인 피를 보고서야 내 머리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감지했지만, 아들은 욕실에 들어오자마자 엄마의 뒷머리에서 흐르는 벌건 피를 보았기에 도무지 진정되지 않은 거였다. 나와 전혀 다른 시점이었던 아들의 마음은 조각조각 난 부스러진 타일의 흔적에서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현장을 바라보는 아들에겐 얼마나 급박한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스물네 살의 아들도 그 순간만큼은 엄마를 잃을까 두려움에 떠는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었던 거다. 그런데 정작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일단 숨을 쉬고 있는 것도 감사하고 팔꿈치와 다리가 부자연스럽기는 해도 옷을 입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머리에선 피가 연신 흐르고 있었지만, 그 역시 곧 지혈이 될 것을 알기에 그 또한 걱정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엘리베이터가 멋대로 위아래를 번갈아 올라가고 내려가며 쿵 하는 굉음과 함께 서버린 고장 난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침착하게 사람들을 위로하고 안심시킬 만큼 생각보다 긍정적이고 당황하는 편이 아니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여러 일화를 통해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정받을 만큼 큰일에는 꽤 침착하고 대범한 편이다. 그래서 그저 아들이 아니고 나라는 것에 대한 안도감에 감사가 나올 뿐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금요일 자정을 막 넘긴 버나비 하스피텔 응급 대기실에는 무척 많은 사람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왼쪽 편 안쪽에 빈좌석이 많은데도 반대 편과 중앙에 복잡하게 다들 서 있는 거였다. 접수처에서 받은 진통제와 소염제 4알을 먹기 위해 물을 가지러 가는 아들에게 빈좌석을 가리키고 발걸음을 옮겼는데 그제야 왜 사람들이 이 자리를 기피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안쪽의 구석 자리는 디귿 즉, 말발굽 형태로 의자가 놓여 있었다. 좌우로 건장한 흑인 남성 둘이 다리를 쩍 벌리고 마주 보고 앉았으니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입구를 막아 놓은 형국이었다. 다리 좀 비켜 달라고 정중하게 말하자, 길을 내주는 입구의 두 남성. 깊숙이 들어가 의자에 앉고 보니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좌우 흑인 청년들 옆에는 사람들에게 가려져 미처 보지 못했던 체구가 꽤 큰 나이가 지긋하신 흑인 여성이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것 알아요? 내가 여기 왜 왔는지요?” 두 청년을 향해 느닷없이 내가 맥락 없는 이야기를 던지니, 그들은 흥미로운지 왜 왔느냐고 묻고 싶은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내 머리가 얼마나 단단한지 타일이 바스러졌다고 웃음을 유발하며 이곳에 오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어이쿠 저런”하는 추임새를 주는 그들을 향해 타일이 깨질 정도로, 내 몸이 공중에 붕 떴다가 떨어졌는데도 이렇게 팔다리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가 있고 아직 사진은 찍지 않았지만, 부러진 데도 없는 것 같다며 이게 다 하나님의 사랑 덕분이다. 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뜻밖에도 “Oh, thank you Lord.” 천장을 향해 두 손을 올리며 두 청년은 시선까지 위를 향하는 것이었다. 때마침 아들이 양손에 쥔 종이컵 안의 물이 흘러 내릴까 조심스럽게  길을 내주는 청년들 다리를 피해 내게로 오고 있었다. “제임스, 엄마를 위해 영어로 기도 좀 해주겠니?” 한국어로 나지막이 속삭였다. 약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던 아들은 지체하지 않고 내 두 손을 맞잡으며 머리를 맞대었다. 그리고 평소라면 들릴 듯 말 듯 옹알이와 같은 아들의 목소리였을 텐데 엄마의 상황은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로, 절박한 마음은 힘 있는 울림으로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 …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와 동시에 두 남성도 우렁차게 아멘으로 기도에 화답하더니 자기들은 형제이고 휠체어에 앉아 계신 분은 엄마라고 소개하며 어릴 때 있었던 무용담으로 이어졌다. 형이 계단에서 밀어서 구르며 넘어졌는데도 심하게 다치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그런 것 같다며 형제는 주거니 받거니 서로의 기억과 추억을 꺼내었다. 끊이지 않는 웃음소리와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사람들을 우리들 곁으로 불러 모았고, 어느새 각각 이곳에 온 이유를 나누며 이것만도 다행인 것은 하나님의 사랑 덕분이라는 것에 한마음이 되어 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곳에 데려다 놓으셨는지…’ 불현듯 떠오른 생각 하나는 감사의 불씨가 되어 마치 화로를 가슴에서 지피는 것처럼 온몸을 달궈 놓는 것이었다. 가장 분주한 금요일 밤을 택하셔서 근심하고 걱정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시기 위해, 나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 아닐까? 그러자 “할렐루야!” 양손이 저절로 번쩍 쳐들어 졌다. 나의 짧고 간결한 외침에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소리로 “할렐루야!”가 터져 나왔다. 그들의 얼굴에 감돌던 긴장이 미소로 바뀌는 아름다운 기적의 순간이 내 눈에 들어왔다. 바로 그때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머리를 다쳐서 응급으로 분류가 되었는지 그곳에 도착한 지 불과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은 시간이었다. 곧바로 MRI 사진을 찍었는데, 예상했던 대로 머리를 비롯한 팔다리 허리 엉덩이 어디 한군데 금이 가거나 부러진 곳이 없다는 사진 판독의 결과를 받았다. 머리 표피를 실로 꿰매려면 한 시간여 기다려야 하고 스템플로 고정했다가 일주일 후에 와서 뽑아도 된다면 바로 해 줄 수 있다고 해서 나는 스템플을 선택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들은 내 손등 위에 자기 손을 포개며 “엄마, 하나님께서 엄마를 무척 사랑하시지? 우리를 정말 사랑하시지?” 말꼬리는 올라갔지만, ‘사랑하셔. 정말 하나님께 감사해.’가 스며든 말이었다. 불과 얼마 안 된 지난 시간이 금요일 철야 부흥회에 다녀온 것처럼 시간 속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은 흩어진 타일 조각에도 있었다. 욕실 사고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는데… 그야말로 이것은 기적 아닌가! 말없이 자잘하게 부서진 타일을 주워 들자, 화로 위에서 끓고 있던 물 주전자가 눈 안에 담기며 흘러내리는 눈물조차 뜨거워 뺨도 달구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 집 욕실은 서너 살 계집아이가 사는 집처럼 예쁜 꽃무늬 미끄러운 방지 스티커로 욕조와 바닥을 도배해 놓았고, 현관 입구 또한 미끄러운 방지 매트를 깔아 놓았다. 게다가 가까운 지인들에겐 욕실의 위험성을 알리고 미리미리 예방하도록 욕실 사고 방지 홍보대사를 자처하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버나비 종합병원을 시작으로 또 다른 병명을 몇 차례 달며 2023년 올봄에 백내장 눈 수술까지 하니 마침내 2년 동안의 병원 투어가 끝이 났다. 제네럴 하스피텔, UBC 하스피텔, 콜롬비아 하스피텔, 버나비 하스피텔 등등 종합병원 탐방을 하게 되었던 시간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는 전도사가 되었다. 수술을 앞둔 환자가 밝고 에너지가 넘치며 오히려 자기들을 격려하고 칭찬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사람은 처음이라고 했다. 입소문을 타고 간호사들이 내게 우르르 몰려오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데려다 놓은 것에 감사하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었다. 내게 주어진 모든 시간은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이미 깨달았기에…. 할렐루야!
 
 
 -2023년 9월 5일 욕실을 닦다가 그날의 흔적을 바라보며 떠올린 은혜의 기적이 생각나서…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예함 줄리아 헤븐 김의 다른 기사 (더보기.)
2024년으로 끝자리 숫자 하나가 바뀌며 엄청나게 쏟아지던 카톡의 홍수가 사라질 무렵에 나는 재미있는 톡 하나를 받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새해 덕담으로 주고받는 톡이 아닌 새롭게 단장한 문인협회 산문 분과의 새 방장님이 쏘아 올린 첫 신호탄으로 그것은 푸른 용의 꿈틀거림처럼 잔잔하던 방안을 뒤흔들어 놓았다. ‘어린 왕자’의 여우 같은 존재가 되려고 한다는 신세대 방장님의 기발한 인사말과 함께 산문 방 한정 초미니 백일장을...
줄리아 헤븐 김
올봄에 백내장 수술까지 하고 나니 릴레이 하듯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병치레에서 비로소 벗어난 듯한 기분이었다. 육십 해 동안 사용한 몸은 재정비라도 필요했는지 여러 병원을 드나들며 마치 종합병원 투어라도 하는 것처럼 그 시작은 2021년 11월 말이었다. 그날은 자정이 다 되어 가던 시각에 샤워하게 되어서 나름 평소보다 물소리와 주위에 신경을 쓰던 중이었다. 그런데 바디샴푸를 바르며 한 발을 살짝 들고 발가락을 닦으려던 순간, 그때까지 한...
예함 줄리아 헤븐 김
나의 씨밀레 2023.07.24 (월)
 내게는 석 달여 남은 올해가 가고 새해가 되어 연초록빛의 귀여운 새싹이 움틀 무렵이면 아흔 살이 되는 친구가 있다. 내가 1960년생이니 33년생 내 친구와는 무려 스물일곱 살 차이가 난다. 스물여섯 나이 차의 큰아들이 있으니 그 친구는 내게 엄마뻘인 셈이다. 그래도 우린 친구고 자매라고 다른 이들에게 소개한다. 우리의 만남을 주선한 이는 예수님이다. 나는 교회에서 ‘Usher’로 봉사하고 있는데, 예배 본당 입구에서 주보를 나눠주며 자석...
예함 줄리아 헤븐 김
줄리아 헤븐 김 / 사)한국문협밴쿠버지부 회원  대학 때 첫 미팅을 나가던 날, 이랬을까? 아니면 일대일 소개팅을 나가던 순간이 이랬을까? 둘 다 아닌 것 같다. 점심시간이 지나감과 동시에 부리나케 열어젖힌 옷장 문. 청바지에 하늘거리는 부드러운 질감의 블라우스를 입고 거울을 보니 내가 기억하는 모습이 아니다. 흰 바지에 감색 티셔츠를 입고 하늘색의 얇은 재킷을 걸치니 역시 내가 아는 몸이 아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 바탕에 흰...
줄리아 헤븐 김
줄리아 헤븐 김 / (사)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인문학을 대표하는 학문에는 철학과 문학이 있는데, 평범한 일상 안에서 출발했다는 공통점이 매우 흥미롭다. 무겁고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는 철학이 알고 보면 정말 단순하게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반복적인 일상 속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 왜? 가 독자적인 장르의 학문으로 발전한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치와 삶에 대한 본질은 인생관 세계관으로 좀...
줄리아 헤븐 김
서있는 시간들 2021.03.15 (월)
줄리아 헤븐 김  /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그리움에 갇혀있던 기억들이 투명한 방울을 밀어내며 꿈틀거릴 때면 신기하게도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다.의지와 상관없이 만들어진 눈물은 상기되어 가는 두 뺨 위에 세찬 물줄기를 대고 멈춰있는 시간 속으로 나를 끌어 당긴다. 그렇게 생성되는 또 하나의 시간을 즐긴다. 흐르지 않는 정지된 순간에 꼼짝없이 갇히기 때문이다.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선택의 고민과 생각 따위는...
줄리아 헤븐 김
선선한 바람이 가을 공기를 뱉아 내며 계절변화가 시작되던 지난해 9월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그 당시 나는 가까운 병원에서 조직검사를 받았는데, 일주일이 지나 갈 무렵 병원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좀 더 정확한 검사가 필요하다며 밴쿠버 다운타운에 있는 종합병원으로 검사예약을 하라는 친절한 전화였다. 그 다음 날에는 암 3기에서도 볼 수 있는 세포를 지난번 조직검사에서 발견했다는 결과 지를 가정의로부터 전해 받았다. 병원건물...
섬별 줄리아 헤븐 김
푸근한 겨울비가 새벽녘부터 부산스럽게 내리던 올 이월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나는 밴쿠버 시온 선교합창단의 지휘자선생님의 권유로 손양원 창작 오페라 밴쿠버 공연유치 준비 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손양원 창작 오페라에 대해 무지해서 타이틀로 내걸린 손양원조차 낯설고 생소했다. 생동감이 있는 현장을 좋아해서 오페라며 뮤지컬, 오케스트라, 심지어 발레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무대공연장을 즐겨 찾던 나였지만, 오페라단의...
섬별 줄리아 헤븐 김